당신의 그림자가 울고 있다
융 심리학이 밝히는 내 안의 낯선 나
로버트 존슨 | 고혜경 옮김 | 에코의 서재
당신의 가장 두려워하는 것을 찾아라.
진정한 성장은 그 순간부터 시작된다.
칼 구스타프 융
나는 선한 사람이 되기보다 온전한 사람이 되고 싶다.
칼 구스타프 융
이 두려운 존재를 인식하지 못하면 끝없이 타인이나 다른 그룹에 투사하게 된다.
어두움 속에 쌓인 그림자에 의식의 빛을 투과한다면 이 비극적 역사의 고리를 끊을 가능성이 생겨난다.
그런 의미에서 자신의 그림자를 들여다보고 껴안는 작업은 우리 각자에게 주어진 역사적인 과제이다.
우리는 모두 온전하게 태어나지만 우리가 타고난 자연스런 특질 중 어떤 부분은 살아 있도록 허용하고 또 어떤 부분은
계승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 문명이다.
......
나는 이 분리작업이 어린이들에겐 너무 빨리 진행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너무 이른 나이에 이런 분리가 일어나면 어린 시절을 잃어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사회화 과정을 겪으면서 신에게서 부여받은 개별적인 특징 중 사회가 수용하는 면은 시소의 오른편에,
그렇지 않은 면은 시소의 왼편에 올려놓는다. 이 시소게임에 적용되는 불변의 법칙이 있는데
그것은 신이 부여한 온전한 특질은 하나도 버릴 수 없다는 점이다.
그렇지만 어떤 예술가들은 최종 산물인 자신의 창작품에 어두움을 포함시켜서
그림자의 요구를 충족시키는 광의의 창의력을 발휘하기도 한다.
......
융은 종종 친구들에게
"최근에 끔찍한 성공을 거둔 적이 있어?"라고 묻곤 했는데,
이는 빛과 그림자가 아주 가깝다는 사실을 깨닫고 있었기 때문이다.
흥미롭다. 예술과 그림자의 연관성. 잘하는 디자이너일수록 성격이 왜 더러운지,
예술가들의 사생활은 왜 그리 문란하고 문제가 많은지. 이 이론으로 설명이 어느정도 가능한듯하다.
밝은면이 있으면 어두운면이 있고, 빛이 있으면 그림자가 있다.
창조가 있으면 소멸이 있다. 우리가 극단적으로 바른쪽에 치우친 행위(창조와 같은)를 했다면
왼편에 놓일 수 있는 행위로 시소의 균형을 맞춰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의 그림자를 타인에게 투사하게 된다.
우리는 의례나 의식을 통해 균형을 되찾을 수 있다.
폭력이 난무하는 삼류소설 한편을 쓰거나 명상을 하는 것도 도움이 된다.
......
무의식은 '진짜' 행위와 상징적인 행위의 차이를 구별하지 못한다.
......
그렇다면 과연 우리가 창의적인 만큼 파괴적이어야 하고 밝은 만큼 어두워야 한다는 뜻인가?
그렇다. 그렇지만 우리가 어디에서, 어떻게 이 어두움에 대한 값을 지불한 것인가는 어느 정도 제어가 가능하다.
이 또한 흥미롭다. 창조적인 행위를 하고 내가 야동을 보거나 누구를 욕하는 것도 일종의 균형을 맞추기 위한 행위일까?
이를 제어하기 위해 어두운 그림, 어두운 글을 쓰는게 도움이 된다니 흥미롭고
이것이 진실일지 의심스럽다. 하지만 분명 내 안에 있는 무언가를 그리거나 표현하면 마음이 한결 가벼워지는 걸 느끼는건 맞다.
입다물고 머릿속에서 상상만 하는 사람이 오히려 무서운법이다.
야한 농담을 입밖으로 내면 오히려 자연스럽게 욕구를 해소할 수 있다.
내가 가진 최상의 특질을 타인에게 투사한다는 사실을 연구하다 보면 마치 커다란 수수께끼를 다루는 것 같다.
사람들은 마치 천국이 너무 빨리 올까봐 두려워하는 것 같다.
<대성당의 살인> T.S Eliot
신이여, 용서하소서!
우리는 스스로를 평범하게 생각하나이다
문을 닫아걸고 불가에 앉아
신의 축복을 두려워하고
신의 밤의 고독을 두려워하고
신의 요구에 온전히 내맡기기를 두려워합니다
인간은 불의를 두려워하지만
신의 정의를 더욱 두려워하고
창문으로 디미는 손
이엉에 붙는 불
술집에서의 주먹
도랑에 빠지는 것을
두려워하지만
신의 사랑을 더욱 두려워합니다.
만일 여러분이 안전한 장소에서 그림자를 만나 평상시 상상할 수 없었던 일탈행위를 해본다면
그 안에서 엄청난 에너지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사람들이 스트레스를 푸는 방법이라고 하는 것들이 비슷한 것일까? 소리지르기, 노래방에서 열창, 과식...
우리가 이 대극적인 요소를 받아들여 그 사이에서 일어나는 충돌을 의식적으로 온전하게 견뎌낼 수 있을 때
역설을 수용할 수 있다. 역설을 받아들이는 능력은 정신적 강인함의 척도이자 성숙의 확실한 표식이 된다.
......
그러나 이것은 명백히 잘못된 틀을 사용한 것이며 대다수 인류가 신경증으로 고통을 받게 되는 바탕이다.
어떤 행동은 세속적이고 다른 행동은 신성하다는 생각은 언어를 아주 잘못 하용하는 것이다.
......
이는 서로 반대편에 있어 고통을 가중시키는 모순에서 벗어나, 반대되는 두 개념을
동시에 즐기면서 둘 다 동등하게 존중할 수 있는 역설의 영역으로 우리가 나아가도록 도와준다.
......
대극적인 것을 서로 반대라고 말하지 말자. 이 대극적인 것들이 인간의 한계상황에서 신이라는 실체와
만날 수 있도록 보완해준다. 두 상반된 목록에서 한쪽은 세속적이고 다른 쪽은 종교적이라 표현하는 것은 옳지 않다.
모두 신의 진실을 나타내는 것이란 생각을 하도록 우리 스스로 훈련해야 한다.
......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걸까? 저걸까? 아마 이걸 따른다면 어떻고... 저렇지 않으면 저렇고......"와 같은 다람쥐 쳇바퀴 도는
표현들을 계속 되뇌일 때가 있다. 이런 표현들 가운데 공통점이라곤 전혀 없다.
하지만 이 상황이 점진적으로 변해서 서서히 동그라미 두 개가 겹쳐지기 시작하면
마침내 만돌라로 성장해나간다. 이것이 바로 치유다. 서로 다른 것들을 동여 묶는 종교체험의 본질과도 같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