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

우리가 참 아끼던 사람

miincheol 2016. 4. 13. 14:22


우리가 참 아끼던 사람 _ 소설가 박완서 대담집

호원숙 엮음 | 달 출판사











왜냐하면 나는 이웃들의 삶 속에 존재의 혁명을 일으키고 싶기 때문입니다. 현실에 무사태평하게 안주하는 태도는 절대로 안된다고 끊임없이 찔러주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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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지 독자들로 하여금 고민하게 하는 것밖에는요. 고민한다는 자체가 인간다워졌다는 것 아니겠어요? 고민 자체가 몹시 중요한 것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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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사랑은 개발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지금 뭔가 잘못 가르치고 있는 것은 '사랑하는 방법'을 개발해주지 못한다는 데 있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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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읽은 소설은 그때 받은 충격이 있기 때문에 나중에 읽어도 좋고 글을 보는 안목도 생기죠. 그런 거대한 산맥을 거치고 나면 자기 작품에 대해 겸손해져요. 내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걸 느끼게 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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깍듯하고 정갈한 태도, 품위 있는 거리감은 상대방과 자신에 대한 예의에서 나온다. 어떤 식으로든 세상에 폐를 끼치고 싶어하지 않는 깔끔한 성품을 본받고 싶다고 생각했다. 나처럼 제멋대로인 인간에게, 진심으로 닮고 싶은 어른이 생기다니.(정이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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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하지 않은 나이죠. 예정에 없었던(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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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 보면 여벌의 삶이지만 내가 원했던 삶이 이것이 아니었나 싶어요. 경제적, 육체적, 감정적으로 내가 온전히 독립했다는 자유의 느낌이 굉장히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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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또 중요한 점은 아이의 말을 끊지 않았다는 점이에요. 바삐 살다보면 아이가 어른에게 부당하게 야단맞는 경우가 있잖아요. 덮어놓고 큰아이를 때린다거나. 그런데 저는 부당하다 싶으면 참지 않고 이건 이랬고 저건 저랬다 말대답을 했어요. 우리 엄마는 그것을 끝까지 들어주셨고 작은어머니는 "아유, 계집애가 저렇게 말대답을 하는데 놔두면 어쩌냐"고 엄마에게 뭐라 하셨죠. 나는 아이들이 자기 논리를 세워 말하도록 끝끝내 들어주는 일이 중요하다고 봐요. 우리 애들도 그랬어요. 한 애는 무르팍에 앉히고 다른 아이가 떠드는 걸 듣고 있으면 품에 안긴 애가 "엄마 나 보고 얘기해" 하면서 내 턱을 제 쪽으로 잡아 돌리던 기억이 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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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모도바르 <그녀에게> 키아로스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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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에는 누추한 생활을 뛰어넘는 힘이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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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도 열등감을 이길 수 있었던 까닭은 내가 어머니에게 듣고 책으로 읽어 수많은 이야기를 알고 있어서였어요. 난 그애들이 모르는 세계를 알고 있었고 이야기를 해보면 걔네들이 아무것도 아니라고 느꼈죠. 여름방학에 내려갈 시골이 있다는 사실도 비슷한 우월감을 줬어요. 서울에선 빈민굴 같은 동네에 살지만 방학이면 내가 자유로울 수 있는 세계가 있다는 생각은 지극한 해방감이었어요. 내 소설이 다른 이에게 그런 힘을, 위로를 주면 좋겠어요.


세이모어의 음악, 수요일마다 업데이트 되는 '빨간책방'과 책들이 요즘 내게 얼마나 위로가 되는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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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역시 글은 아름다워야겠지요. 제가 집 짓는 일에 더러 비유를 하는데, 집이라는 게 기능적이면서도 아름다워야 하잖아요. 글이라는 것도 그래야 하겠지요. 덧붙인다면 들어가고 싶은 집이기도 해야겠지요. 이를테면 서두 같은 데서 독자를 끌어당기는 힘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디자인으로 말하자면(그 중에서도 북디자인) 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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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노갑 선생님께서 그런 질문을 하신 적이 있어요. 포도주가 만들어지려면 뭐가 필요하냐. 우리는 포도, 소주, 설탕 뭐 이런 대답을 내놓았는데 선생님의 대답은 '시간'이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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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작가들, 다들 재주들은 많은 것 같아요. 그런데 처음부터 '나는 글을 쓴다' 이런 식으로 생각하지 말고 그냥 생계를 위해 하루하루를 사는 보통 사람의 생활을 체험하는 일이 필요할 거라는 생각이 들어요. 체험과 상상력이 행복하게 결합되어 있지 않고 상상력만 과잉되어 있는 작품들은 읽고 나면 좀 허망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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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들이 실제로 그렇지 않나요? 비열하고 욕심 많고.(웃음) 난 억압의 관계가 싫어요. 평등의 관계가 좋죠. 남성 우월주의도 싫지만 여성 상위도 싫어요. 여성을 흔히 물에 비유하잖아요. 여성은 부드럽다든가 약하다든가 말하는데, 남성의 강하고 씩씩한 면과 여성의 부드러움이 조화를 이루는 게 좋죠. 여성성과 남성성은 완전히 동등한 거고 그게 서로를 보완하고 조화를 이룸으로써 행복을 추구하는 거지, 여성이 남성화되거나 여성을 닮아가거나 하는 건 아닌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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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경험으로 문학은 우리가 가장 고통스러울 때 위안이 되고 힘이 돼주는 것이 아닌가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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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사는 사람에게도 위안이 필요하지요. 소위 팔자 좋게 잘사는 생활의 답답함이 있잖아요. 고통에만 위안이 필요한 게 아니라 안일해서 무기력해져버린 삶에도 위안이 필요하죠. 내가 쓴 게 남하고 만나져서 위안이 되고 힘이 되고......




1. 큰 사람, 어른, 닮고 싶은 사람

박완서, 세이모어 번스타인, 변월룡을 만났다. 박완서는 약 두달에 걸쳐서 만났고 세이모어와 변월룡은 이번 한주 동안 만났다. 이들은 어쩌면 이렇게 또박또박 연필로 잘 쓴 글씨처럼 반듯하고 정갈한지... 어쩜 이토록 궁에 있는 나무들처럼 고고하고 잘생겼는지... 한마디 한마디 말씀이 정확하고 쉬워서 그리고 무엇보다 그들이 직접 살아내고 느낀 일들이라 가슴에 와닿는다. 


박완서 선생님은 웃는 모습이 참 선하다. 어릴적 사진들을 봐도 그 모습은 그대로다. 선하지만 강하다. 박완서 생님의 책 제목들이 좋다. <부끄러움을 가르칩니다> <배반의 여름> <엄마의 말뚝>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그해 겨울은 따뜻했네>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 <친절한 복희씨> <기나긴 하루> 등...읽고 싶어지는 제목들이다. 박완서 전집의 디자인은 선생님의 이름에 걸맞지 않게 가볍다. 표지가 참 귀엽다. 문학의 표지는 좀 더 많은 걸 담을 수 있다면 좋겠다. 게다가 박완서인데, 우리나라에서 손가락으로 꼽을 수 있는 유명하고 큰 작가인데 디자인이 크지가 못하다. 작다. 


세이모어 또한 웃는 모습이 선하다. 부드럽고도 힘이 있다. 큰 품이 느껴진다. 제자들을 대할 때의 그 다정함을 닮고 싶다. 그리고 정확한 가르침. 얼마나 많은 연습을 통해서 그 경지에 다다른 걸까. 변월룡의 에칭작품을 봐도 그런 생각이 든다. 대체 얼마나 많은 연습을 했길래 이렇게 그릴 수 있는 걸까. 어마무시한 그 선들과 인물과 풍경을 잡아내는 실력, 바람과 햇살까지 표현해내는 그 선들. 선의 얇고 굵음, 진하고 옅음, 자유로운 선과 정렬된 선들, 프레임 바깥쪽의 자유로운 선들이 특히 좋았다. 너무 완벽한 작품들을 계속 보면서 약간은 답답함을 느낄 정도였다. 


디자이너로서 나는 어떻게 훈련을 하고, 어떤 마음가짐을 갖어야 할지 고민이 된다. 사실 훈련보다도 내 마음이 신경이 쓰인다. 


2. 소설과와 화가, 피아니스트 그리고 디자이너 얼마나 같고 얼마나 다를까 

세이모어의 음악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며 나도 디자인을 저토록 사랑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음악과 그림, 문학은 순수하고 고고하고 순수하여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존재라면, 내가 하는 디자인은 천박하고 사랑받을 자격이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산업과 떼어낼 수 없는 일이라서 그렇게 느끼는 걸까? 돈을 천시하는 내 성향때문에 그럴까? 하지만 소설가도 화가도 피아니스트도 돈을 받지 않는가. 하지만 돈을 위해서 작품을 만들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돈을 벌기 위해서 회사에 다니고 있다. 돈을 주지 않는다면 회사에서 하는 작업들을 스스로 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돈을 받지 않아도 디자인을 하고 싶은가라고 묻는다면, 하고 싶다. 남권이의 일을 하면서도 용현이의 일을 하면서도 그리고 회사에서도 어떤 작업은 내게 큰 기쁨을 줬다. 아름다운 것을 만드는 기쁨. 제 얼굴을 찾아주는 기쁨.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좋은 선물을 안긴 기쁨. 


문학과 음악, 그림과 같은 큰 힘은 없을지언정 얕고 넓은 힘이 디자인에게 있을듯 싶다. 아니, 어쩌면 넓고도 클수도 있겠다. 예술을 하는 사람들의 큰 목표 중 하나는 자기실현과 혁명이 아닐까. 이것을 써내야만 하는 그려내야만하는 자기 욕구의 실현. 변월룡은 조국을 따뜻한 색으로 그려야만 했고, 박완서는 경험을 써내야만 했다. 그리고 본인들의 작품을 소비하는 사람들을 바꾸고야말겠다는 야심. 혁명에 대한 욕구. 자기 실현면에서 디자인은 일단 예술과 길을 달리 한다. 자기의 실현이라기보다 상대방의 욕구를 실현해준다. 시각화해준다. 그 시각화하는 과정에 나의 미적인 감각이 반영이 되겠지만 이것은 변월룡과 박완서의 그것과는 다르다. 디자이너가 개인적인 작업을 한다면 비슷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대부분의 디자이너가 하는 작업은 예술과의 그것과 시작, 근원이 다른 것이다. 두번째로 혁명에 대해서 얘기해본다면, 어쩌면 그렇다고 말할 수 있겠다. 문학과 음악 그림도 이제 디자인의 힘을 받지 않을 수 없다. 책표지를 디자인하고, 음반 자켓과 포스터를 디자인하고, 전시회의 포스터와 브로셔를 디자인해야만 한다. 디자인은 간접적으로 그들의 혁명을 돕는 조력자이다. 혁명을 하는 주체는 아닐지언정 혁명가를 숨겨주는 사람정도는 될 수 있겠다.

또한 혁명이라면 혁명이라고 할 수 있다. 라는 생각. 황인찬의 인터뷰중 자신의 시가 세상을 바꾸지 못했다는 것에 대한 좌절감에 대한 얘기를 듣고 우습게 느낀적이 있다. 시가 소설이 대체 얼마나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인가 라고 생각하며 오만하다고 여겼다. 하지만 그 믿음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문장 하나가 붓 터치 하나가 피아노 건반 하나가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어야만 혁명을 실현할 수 있는 기본적인 조건 중 하나를 충족시키는 것이 아닐까 생각이 된다. 디자인도 마찬가지다. 그 믿음이 중요하다. 내가 하는 디자인이 혁명이 될 수 있다는 믿음. 스쳐지나가는 포스터가 레터링이 지나가는 사람을 멈춰 세울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 엄청난 것이다. 그것만으로 성공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중요한 건, 나는 디자인을 하는 데 적합한 사람이냐는 물음. 왜 나는 이리도 디자인이라는 것에 의문을 품고 내가 디자인을 한다는 것에 대해 부정적인 시선을 던지느냐하는 거다. 


일단 예술가들처럼 나는 자기실현의 욕구가 그리 크지 않다. 그렇다면 사람들의 얘기를 듣고 그것을 시각화하는 작업에 대한 욕구는 있는가? 정확하게 잘 모르겠지만 일단, 사람들의 얘기는 잘 들어주는 편이다. 편한 친구가 아니면 말을 많이 아끼고 들어준다. 최대한 열심히 듣고 기억하려고도 한다. 그렇다면 시각적인면은. 시각적인 것에 아무래도 다른 감각보다 민감한 편이다. 그 재능이 뛰어난가에 대한 것은 아직 잘 모르겠다. 천재과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재능이 없다고 생각이 되진 않는다. 지금까지로선 재능이 그럭저럭 있고 노력이 많이 필요하다는 정도. 특히 논리적인 생각. 명확한 의도를 가진 디자인 능력. 스쿼시라면 내가 공을 이런 자세로 쳐서 우측 상단 두번째 칸에 맞춰서 스트레이트로 공이 날아가 반대쪽 벽에까지 꽂혀서 상대적으로 왼쪽에 서 있는 상대방이 못치도록 하겠다. 라는 정도의 정확한 의도를 가진 디자인.


재능은 얼추 갖춘것 같은데 디자인에 품는 의문들은 무엇이냐. 좋은 디자인은 뭐고 좋은 디자이너는 뭘까? 그리고 난 앞으로 어떤 식으로 훈련을 해야할까? 문승영 선생님이 말씀한대로 디자인 일지를 꼬박꼬박쓰려고 노력해야겠다. 일과 후에 회사에 남는건 조금 부끄럽고 다음날 아침에 일찍 가서 써보도록 노력하겠다.